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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합니다

[서평, 리뷰] 공허한 십자가 - 히가시노 게이고

by 열공직딩 2022. 6. 2.


『공허한 십자가』는 사형제도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시선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살인을 저지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강도 살인 전적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가석방 기간 중에 주택에 침입하여 여덟 살짜리 소녀를 살해하였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사형을 형벌이라 여기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 들였으며, 속죄는 하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중학생 커플이다. 열띤 사랑의 결과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에 아이를 출산했으나 그 즉시 아이를 죽이고 자살 명소로 유명한 수해에 사체를 묻는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시간이 흘러 여자는 몇 번인가 자살시도와 함께 불행한 인생을 보낸다. 남자는 소아가 의사가 되어 난치병에 걸린 아이를 구하며 살고 있다. 두 사람은 21년 전 사건을 계속 속죄하면서 살아 왔다. 

사형제도는 과연 효용성이 있는 것일까. 작가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한 편 이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는다. ‘내가 만일 살인사건의 유족이 된다면‘ 이라는 끔찍한 가정 하에, 치열한 법적 공방을 마치고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범인의 사형을 상상해 본다. 과연 나는 사형이라는 심판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약간의 울분은 가실 수 있겠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형은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에 불과할 뿐이다. 유족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으리라. 평생 동안 등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유족이라는 역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자의 반성이 공허하고 의미 없는 십자가에 불과할지라도 감옥 안에서 평생 등에 지고 있어야 한다는, 아마도 작중 인물을 통해 드러낸 작가의 주장에도 십분 공감한다. 

   『공허한 십자가』를 읽으며 작가의 다른 소설인 『편지』가 계속 생각났다. 『편지』에는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형)의 가족(남동생)이 겪는,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결코 뗄 수 없는 낙인이 찍힌 삶과 교도소에서 피해자의 유족에게 계속 사죄하는 편지를 보내는 형이 등장한다. 유족은 계속 편지를 받지만 결코 형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사죄하러 온 동생의 사과를 받지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정리하기를 원한다. 아무리 진심어린 반성과 속죄라 해도 결국 그것은 유족에게 있어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짧은 소설 속에 ’사형제도‘ 라는 무거운 주제를 그 특유의 이야기 솜씨로 풀어낸 저자의 필력에 언제나 그랬듯이 감탄하며, 다시 한 번 ’사형제도‘에 대해 곱씹어본다. 

 

한 가지 사건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건에 따라서 이야기는 모두 다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의 결말을 ‘범인이 사형에 처해졌다’는 말로 끝내도 좋은가, 하고요. 그건 결국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 말고 어떤 결말이 있느냐고 물으면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지만요. 그 대답이 보이지 않아서 사형 폐지를 주장하다고 해도 결국 벽에 부딪쳐 버립니다.

 

히루카와는 사형을 형벌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요. 재판을 통해서 그가 본 것은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가느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요. 그가 상고를 취하한 이유는 겨우 운명이 정해졌는데 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제 모든 게 찮다,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형이 확정된 후에도 편지나 면회를 통해서 나는 계속 그에게 연락을 했지요. 그가 자기 죄를 똑바로 바라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사건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운명밖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히루카와도 결국 진정한 의미의 반성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형 판결은 그를 바꾸지 못했지요. 사형은 무력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재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절실하게 깨닫지 않았을까? 사형을 형벌로 여기지 않고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아무런 반성도 없이,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다만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

 

그 사건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어서, 어떻게 하면 속죄할 수 있을지 생각했지요. 소아과를 선택한 것도 꺼져가는 작은 생명을 하나라도 많이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법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하니까요.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돼요. 당신 남편을 그냥 봐주고 모든 살인을 봐줘야 할 여지가 생기게 돼요.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도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남편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에요. 나카하라 씨, 아이를 살해당한 유족으로서 대답해보세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아마 이 의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겠지요. 이번에는 당신이 고민해서 내린 대답을 정답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위 내용은 2021년 02월 작성한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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